1. 영화 <항거> 줄거리
2019년은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였다. 사해(四海)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일렁이던 1919년, 그 파동의 중심엔 뜨거운 열망과 정도(正道)에 대한 의식을 겸한 학생들이 있었다. 그 중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의 명단에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바로 유관순(柳寬順, 1902 ~ 1920)이다.
유관순 열사의 이름 석 자 정도는 기본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대한민국인이라면 그녀의 활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이다. 그녀가 독립운동가이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사실도 함께. 계기성 덕분인지 3·1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유관순의 이름이 국가사회적 요구에 의해 대대적으로 조명되고, 그녀는 최고 등급의 국가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드디어 그녀를 주제로 한 영화 <항거>가 개봉했다. 영화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유관순 열사의 자서전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저항정신과 투쟁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졌다. 영화 제목인 'Resistance'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기 파시즘(Fascism)에 저항했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항거>의 줄거리는 유관순 열사가 천안의 아우내(병천)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다니며 3·1운동을 주도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며 순국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기존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 뿐만 아니라, 유관순 열사의 내면과 그녀와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료 독립운동가들의 삶까지도 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2. 역사적 배경
영화 <항거(Resistance, 2019)>에는 유관순 열사의 저항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수감 이전 시기에 대해 간헐적으로 조명한다. 이 부분에서 영화에 담긴 역사·사회적 배경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은 1910년대 서울과 공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부근을 자주 왕래하며 교회를 세웠는데, 유관순 열사가 푸른 눈의 앨리스 샤프 선교사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선교사는 소녀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기뻐했고 성경을 술술 암송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겼다. 영화에서도 식사전 기도를 외는 모습이 등장하듯 소녀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와 숙부가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선교사는 그녀 가족을 만나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가족들은 흔쾌히 허락했고 소녀는 1914년부터 2년간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선교사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았고, 1916년에는 서울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전학시켰다.
그렇게 이화학당에서 새로운 학문과 근대적 사상을 공부하던 소녀는 시간의 다층적인 누적을 통해 지도적 역량을 갖추며 성장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 서울 종로에서 광무황제의 인산일을 계기로 삼아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마주하게 되고, 유관순 열사는 직접 만세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이란 시간을 기다려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3·1만세운동으로 골치를 앓던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무마시키고 장내(場內)를 안정화하기 위한 명목으로 총독부를 통해 휴교령을 내리는데, 일제의 의도와 달리 역설적으로 이 조치로 인해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된다. 당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학교에서 선각자적 태도와 지도적 역량을 키운 학생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알리면서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중에 유관순 열사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 인근 지역 주민들과 연락하여 4월 1일 아우내(병천)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약 3,000여 명이 모인 이 만세운동 현장에서 총과 검을 앞세운 일제의 무력탄압에 의해 10명이 죽고 40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 유관순 열사는 아버지(유중권)와 어머니(이소제)를 모두 잃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오빠와 함께 투옥된 유관순 열사는 옥고 중에도 굴하지 않고 기개를 잃지 않았다. 손톱이 뽑히고 성고문을 당하는 등 온갖 악형을 당하는 와중에도 유관순 열사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옥중에서의 3·1만세운동을 전개한다.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주년이 되는 그 날 유관순 열사는 가장 혹독하다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의해 더욱 더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했던 의거(義擧)를 부정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출소 만기일을 2일 남겨둔 채, 유관순 열사는 '방광파열'이라는 끔찍한 사인(死因)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유관순 열사의 묘가 또 다른 만세운동의 촉발점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 일제에 의해 망실되고 현재는 병천의 초혼묘(招魂墓)만이 남아 있다.
3. 총평
1) 새롭게 발굴해 낸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복원된 노래
영화 <항거(Resistance, 2019)>에서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조명했다. 김향화, 권애라, 이옥이 열사를 발굴, 조명해냄으로써 '유관순'이라는 강렬한 이름 뒤에 가려진 수많은 열사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조각조각 난 독립운동가를 모아 영화 속에 붙여넣음으로써 영화를 생동감있게 만들었다. 영화 초반 옥중 열사들이 다리가 붓지 않기 위해 방안을 돌며 부르는 노래는 영화 <덕혜옹주>에서 불려지던 '신파의 아리랑'과는 차원이 다르게 무거운 떨림을 전해준다.
2) 3·1만세운동의 다양한 의미
영화는 3·1만세운동의 상징이 된 유관순 열사의 저항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인물 간 대화를 통해 3·1만세운동의 개인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김향화 열사 역의 말을 통해 만세를 부른 이유는 각자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뜨겁지만 다소 거창한 '독립'이라는 말이 어떤 개인에게는 아득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고, 당장 현실 속 자신의 삶을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길이 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김향화 열사 역의 말을 통해서 3·1운동은 독립운동이었으며 차별로부터의 이탈, 신분으로 인한 무시와 멸시로부터의 해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화류계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할 때 그들은 독립 외에도 억압과 차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추구했다고 대학교 때 읽은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그들에게 3·1운동은 나라의 자유를 쟁취하는 길이기도 했지만,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68년 일어났던 68혁명이 떠오른다.
3) 화면 전환 효과(흑백과 컬러)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점은 화면 전환 효과다. 단순 기법적인 측면을 넘어서 이 효과는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투옥 이전 유관순 열사의 삶을 컬러로, 투옥 이후 옥중 항거를 주도하는 유관순열사와 동지들의 모습을 흑백으로 처리하며 이 두 장면이 번갈아가면서 제시된다. 컬러로 처리된 장면은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커가는 시기로 열망과 꿈의 공간이자 준비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준비의 세계에서는 희망의 빛이 뒷통수를 따스하게 비추면서 금방이라도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것 같다. 하지만 빛이 질량을 태우며 생성되듯이, 서서히 희망 뒤편에 위치한 그림자는 다가오고 있다. 결국 흑백은 도래한다. 한 줄기의 희망도 보이지 않고 짙게 드리운 그림자만이 쾌쾌한 음지의 기운을 뿜어내며 등골을 엄습하는 어둠의 공간과 시련의 세계. 하지만 이 시기를 통해 유관순과 그의 동지들은 더욱 더 끈끈한 단결을 통해 꺼져버린 희망의 필라멘트에 열을 가한다.
흑백과 컬러의 교차로 인한 영화적 효과는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완전한 이행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온갖고문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유관순 열사가 옥방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 장면, 그 순간 흑백이던 장면은 컬러로 마치 물이 들듯이 서서히 전환된다. 이 부분을 통해 유관순열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따뜻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클라이막스를 후반부에 배치한 영화적 설정이 꽤 맘에 들었다.
4) 축소된 유관순 열사의 저항정신
영화 <항거(A Resistance, 2019)>의 장점이자 단점은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관객이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체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로 인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감독의 배려일수도 있고 일부러 자극적인 장면을 삭제하고 명암처리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일수도 있다. 영화에서 장면의 삭제나 생략은 양날의 검이다. 영화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성고문을 받는 장면도, 귀를 잘라내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영화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를 선택하는 건 감독의 재량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관객의 의아스러움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다는 역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사실 위 내용이 아니다. 양날의 검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을 뿐더러 내가 둔 초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연관된 아쉬움은 존재한다. 유관순 열사의 저항정신을 다소 축소, 생략한 측면이 많다는 점이다. 유관순 열사와 동일한 방에서 수감생활을 한 독립운동가 어윤희 열사의 증언에 따르면 영화와 달리 유관순열사는 시도 때도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탓에 간수들에게 발길로 모질게 폭행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이정은 선생이 집필한 책을 토대로 하면 유관순 열사의 만세 소리는 동지의 간곡한 부탁이 있은 뒤에야 사그러들었다고 한다.
비교적 차분하게 묘사된 영화 속 유관순 열사의 모습과 달리, 실제의 유관순 열사는 피를 토하는 목청으로 만세를 쉴새 없이 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5) 엔딩크레딧
영화에서 가장 노력을 들인 부분은 바로 엔딩크레딧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를 발굴하고, 이를 컨텐츠로 변형시켜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대중에게 피력하는 역사 소재의 영화 특성상 엔딩크레딧은 많은 공을 들이는 부분 중에 하나다. 관객들이 영화가 끝나고도 식지 않은 감동과 생각거리로 좀 더 앉아 있도록 만드는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감독들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런 측면에서 <항거(A Resistance, 2019)>는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관순 열사에 관련된 영화지만 단순히 유관순 열사에 대한 조명에서 끝나지 않도록,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엔딩크레딧으로 배치하며 실제 배우들이 녹음한 '석별의 정'을 OST로 삽입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의미 없이 지나가는 사진 슬라이드가 아니라, 그들을 생각하고 진심으로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 엔딩크레딧은 어느새 '의식'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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