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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은 과연 신화였는가?

by 동쌤의 소셜머니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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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체제가 비합리적인 수준에 머무른다면 전체주의, 포퓰리즘, 중우정치 등 불합리한 형태의 사회 체제가 등장할 수 있다. 또한 과거의 경험은 왜곡되고 변질되기 쉬워 특정 집단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무드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에 대한 시각이다. 박정희 정권은 초기의 혁명 공약과는 달리 독재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경제 발전의 신화를 만들어냈으며, 집단기억을 공적 기억으로 날조·조작함으로써 그들의 지지층을 형성했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 기억을 형성해 이를 꾸준히 분석하고 역사화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최근에 들어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에 대한 반 기억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 기억은 공적 기억에 비해 구체화 되지 못한 채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을 과연 '신화'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 반 기억의 입장에서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본론

1) 19601970년대 국제 경제 상황

  독일은 1945년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뤘다. 대만은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까지 고도성장을 했으며, 프랑스 등 서유럽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조차 1960년대부터 경제가 성장했다. 유가(油價)가 배럴당 2달러 이하로 아주 낮았기 때문이다. 즉 즉 1960년대-1970년대는 세계 경제가 대체적으로 좋았던 시기였다. 세계 경제 호황은 1973년 오일 쇼크 이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가 집권한 시기는 국제적 경제 조건이 좋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19601970년대 국내 경제 상황

  4·19 이후 수립된 장면 정부의 역시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 즉 경제 제일주의였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가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다. 장면 정부 당시 국민의 경제발전 열망과 교육열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수준이었다. 이미 이승만 정부 당시 초등학교 진학률이 90% 넘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대 대만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선거에 매진하느라 경제발전에는 거의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앞서 제시한 사례로 경제 발전을 위한 국내 요인도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남미 아메리카와 다르게 농지 개혁에 성공해 노동력의 원천인 인구 이동의 제약이 없었던 것도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성공 배경이다. 또한 오일 쇼크 이후 선진국 경제가 휘청거릴 때 한국은 되레 기회를 잡았다. 유가 폭등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국들의 수익이 치솟으면서 중동 건설 특수가 발생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과 잘 부합했다. ‘공사기한에 맞춰 순식간에 만들어주는능력이 당시 국제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연구자인 서중석은 그때 건설부 장관이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였어요. 김재규가 큰 공을 세웠죠. 그런데 김재규는 내가 한 게 아니다. 기업인들의 역할이 컸다고 말해요. 실제로 정주영 같은 사람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죠. 박정희하고 별 상관이 없어요.”라고 밝히기도 했다. 중화학 공업 투자도 중동 특수 덕분에 가능했다고 서 교수는 말했다. 그전에는 정부가 특혜를 준다고 해도 나서는 기업이 없었는데, 중동 건설 붐으로 자본을 축적한 뒤에는 재벌들이 너도나도 뛰어들게 됐다는 설명이다. 경제는 박정희라는 등식이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논증이다.

 

결론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그동안 공적 기억의 늪에 가려져 비판적인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그 실상이 밝혀지고 있다. ‘한국형 경제 신화라고까지 칭송되던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발전은 박정희라는 개인의 역량만으로 달성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신화가 아니고, 당시의 유리한 국내외 정세와 민주주의의 말살을 바탕으로 한 결과물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라는 폭압 속에서 치러진 197812·12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부마항쟁이 밤이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던 점 등 박정희 정권의 경제 실정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즐비하게 발견되고 있다. 독일이 이뤄낸 라인강의 기적의 경우 연방경제장관과 수상을 지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역할이 크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만도 장제스나 그 아들인 장징궈의 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국가의 국민들은 그들을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한 독재자라고 비판한다. 당시 국내외 조건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혼자 이뤄낸 게 아니었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는 현대사 공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한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 맞는지 되짚어 봐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다. 따라서 언제나 당연하게 여겨져왔던 공적 기억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적극적으로 반 기억을 발굴, 연구하여 통합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절실하고,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후 앞에서 제시한 연구에서 더 나아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이 당시 세계 정세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통계자료를 조사, 연구하는 노력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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